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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주차 - 황혼이 지나면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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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주차 - 황혼이 지나면

알 수 없는 사용자 2016. 5. 27. 23:57

황혼이 지나면

 

오늘 하루도 지리멸렬했다. 어제와 똑같은 일을 지리하게 되풀이했고, 그나마 손에 잡히는 일은 멸렬하게 끝나갔다. 퇴근길을 나는 거의 기어서 돌아온다. 버스에서 내릴 때쯤 난장판이 되어있을 자취방을 떠올린다. 이대로 집에 가면 나도 쓰레기가 된 기분으로 쓰레기들 사이에서 웅크려 있으리라. 오늘 밤 내내. 그래서 나는 집에 가는 대신 카페에 들어가 앉는다.

꽃이 그려진 찻잔과 종이갓이 달린 전등, 헝겊 표지 공책. 소소하면서도 따뜻한 소품들이 딴 세상 물건들처럼 놓여 있다. 내가 있어서는 안 될 곳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하지만 주저앉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피로가 턱끝까지 차올라 있었다. 젖은 이불처럼 늘어져 있다가 정신을 차린 건, 내 앞에 찻잔이 놓였을 때였다.

유자차에요. 오늘 되게 힘들어보이셔서... 서비스요.”

아마도 사장인 듯한 여자가 싹싹하게 한 번 웃고는 돌아간다. 나는 경황 없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내가 있어서는 안 될 곳 같다는 생각에 돌멩이가 하나 더 올라간다.

유자차는 미뢰가 짜르르 울리도록 달았다. 목을 지나 흘러간 당분이 독처럼 퍼지는 광경을 상상한다. 그러다 건너편에 있는 남자가 아까부터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상을 가릴 정도로 큰 뿔테안경을 쓴 남자. 정확히는 날 보는 게 아니고 내 머리 위쪽을 보고 있었는데, 오히려 그게 더 신경이 쓰였다. 불길한 눈빛이다.

나는 서서히 그 시선을 못 견뎌하고 있었다. 불편함이 불쾌함으로 변하려는 찰나, 그 남자가 일어나 내게로 왔다.

잠깐 이야기 괜찮으세요?”

남자가 물었다. 나는 일어나서 잔을 카운터로 가져다 두고 사천 원을 잔 옆에 둔 뒤, 카페에서 나왔다.

남자는 따라나왔다. 나는 집으로 걸었다. 뒤에서 남자가 말했다.

대답 안하셔도 되는데, 요즘 이상하게 많이 피곤할 텐데요. 환청이 들리거나 헛 게 보일지도 모르고. 아니면 그냥 계속 가세요.”

나는 계속 집으로 걸었다. 남자는 여전히 따라왔다.

지금 해결 안하면 문제 더 커집니다. 모른 척 하고 있으면 안 돼요.”

나는 여전히 집으로 걸었고, 남자는 계속 따라왔다.

최근에,”

그는 아마도 망설였다.

죽은 사람을 다시 본 적 있죠?”

나는 멈춰서서 그 남자를 돌아봤다. 남자는 한두 걸음 물러서더니 양손을 방어적으로 들어올렸다.

협박하는 거 아니에요. 여기, 이런 사람입니다.”

남자가 명함을 건넸다. 나는 받아서 옆으로 버렸다.

남자는 당황하지 않았다.

상황이 급해보이니까 짧게 설명을 할게요. 이것도 못 듣겠으면,” 남자는 잠시 침묵했다. 그의 뒤에서 HOF라 쓰여진 낡은 네온 사인이 깜박거렸다. “이것도 못 듣겠으면, 그냥 가시면 됩니다. 그러면 끝. 저도 더 안 따라갑니다.”

나는 남자를 봤다. 두꺼운 안경알 너머의 눈은 고요하고 침착하다. 나는 시선을 돌렸다. 저런 눈은 마주보기 어렵다.

그럼 듣는 걸로 알고 설명합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남자는 안경을 벗었다.

여기 이 안경이요. 특별한 훈련을 받은 사람이 쓰면 좀 다른 게 보여요. 일상적인 거랑... 좀 달라요. 어떤 게 보이냐면, 그러니까 이 안경을 쓰고 당신을 봤을 때 어떤 게 보였냐면, 당신 뒤에 남자가 보였어요. 안경을 끼고 머리를 뒤로 묶은 남자.”

철렁. 심장이 내려앉았다.

보기에 따라선 그렇게 보이죠.”

남자가 말했다. 나는 애써 표정을 가다듬었지만 남자는 알아챈 눈치였다.

짚이시는 게 있는 것 같은데.”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요?”

남자는 씩 웃었다.

어떤 사람은 안경 없이 보기도 하고, 같은 안경을 써도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게 보기도 합니다. 결정적으로 해석하기에 따라서 좀 다르긴 한데, 당신 뒤의 남자처럼 특별하게 보이는 걸 보통은 이렇게 해석들 해요. 귀신, 아니면 영적인 존재.”

나는 숨을 깊게 들이켰다. 세상엔 미친 놈들 투성이다.

그리고 특별한 조치를 안 하면 위험해지는데... 들러붙은 사람을 좀먹는다고 하죠. 체력이 많이 떨어졌을걸요. 특히 오른쪽 팔 많이 아프겠네요. 그 시계 낀 팔이요.”

반사적으로 오른팔을 움츠렸다. 오른팔이 아픈지는 오래됐고 병원에서는 아무런 진단도 못 내렸다.

일단 그 시계 푸세요. 그것 때문에 나빠지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왜 난데요? 왜 나한테 그래요?”

남자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뒤에 있는 남자한테 물어봐야할 것 같은데. 아니, 그러지 말고 들어보세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요. 적어도 도와줄 수는 있어요. 그러니까... 공짜는 아닙니다. 비싸게 느껴질 수도 있는데 보기에 따라선 저렴해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그쪽은 돈을 낸다. 난 그쪽을 돕는다.”

돈 이야기가 나오자 그제서야 안심이 된다. 모든 게 명료해진다. 앞의 남자가 사기꾼이든 미친놈이든 뭐든, 작업을 거는 것도 아니고 같잖은 선의를 베푸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돈을 원하는 것이다. 이래서 자본주의가 좋다. 간편하고 단순해서. 돈이 모든 것을 해결하는 세상이 아니었다면, 나 같이 폐쇄적인 인간은 사람을 마주칠 때마다 고통스러웠겠지.

선금은 이번 같은 경우엔 20만원이고, 잔금은 과정에 따라 삼십에서 오십만원 정도 나올 거예요. 해결 과정에 드는 비용은 전액 이쪽에서 부담합니다.”

.”

나는 발을 돌려 다시 집으로 향한다. 남자는 따라오지 않았다. . 불쾌함과 슬픔과 진저리가 배배꼬여 뱃속 깊이 들어앉은 기분이었다.

 

자취방엔 어둠이 시체처럼 방치되어 있었다. 불을 켤 생각도 못하고 나는 침대에 엎어진다. 그저 하루하루, 살아있는 것만으로 아프다. 엎드린 채로 그를 생각한다.

그는 미용실 가는 걸 지독히도 귀찮아했다. 같이 산 이후로 한동안은 내가 머리를 잘라줬지만 얼마 안 가 그것도 귀찮다며 머리를 묶기 시작했다. 미처 묶이지 않고 목덜미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난 참 좋아했더랬다. 그는 머리가 길면 머리카락을 팔아 내게 빨간 손목시계를 사주겠노라고 허무맹랑한 말을 늘어놓곤 했다. 빨간색을 좋아했다 그는,

기분이 좋을 때면 내게 시를 읽어줬다. 보통은 좋아하는 시집을 읽었고 가끔은 직접 쓴 것을 읽었다. 그의 시는 형편없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단어가 따뜻했고 말투가 상냥했다. 문학상에 응모할 때마다 상금을 받으면 빨간 손목시계를 선물하겠노라 선포했는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따뜻하고 상냥하다고 상을 받는 건 아니었다.

우리는 가난하지만 행복했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가난은 우리 삶을 조각조각 찢어내선 잘근잘근 씹어댔다. 그의 시는 팔리지 않았고, 그럴수록 집요하게 써댔다. 나는 일하고 일하고 일했지만 우린 여전히 가난했다. 피로가 독처럼 쌓여갔다. 우린 그것들을 한껏 갈무리했지만, 가끔은 주워담을 수 없는 물처럼 엎질러졌다.

하지만 우린 때때로 행복했다. 나와 내 사람이 온전하게 거할 수 있는 공간을 가진 건, 그도, 나도, 처음이었다. 온전하게 나와 내 사람만을 위해 일해본 것도 처음이었다. 그는 시를 쓰고, 나는 일한다. 이런 단순한 공식에 만족을 느끼던 그 시절.

 

옛날 생각은 그만 하기로 하자. 당장 내일 할 일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온몸에 털이 바짝 곤두선다. 소름이 돋아나는 것을 느낀다. 소름이 시작되는 건 늘 오른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에서부터였다. 지금처럼. 꼴딱, 의식하지도 못한 채 침을 삼켰고, 목을 지나 넘어가는 소리가 북처럼 울렸다.

내 뒤에 누군가 서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게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익숙한 상황이므로. 이제 내가 고개를 돌리면 그가 보일 것이다. 피눈물이 맺힌 채로 혀를 빼물고 있을. 나는 말라죽은 고목처럼 오늘밤 내내 그를 쳐다보고만 있을 터였다.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아침해가 뜰 때까지 깨어날 수 없다는 것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피곤에 못 이겨 어느 순간 잠에 든 것이었다. 그리고 가위에 눌린다. 매일같이 반복되어온 익숙한 상황이었다. 익숙한 공포가 몸을 타고 기어오르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거기에 미약한 기쁨이 스며들어 있다는 것도 느낀다. 이 순간 나는 죗값을 치르고 있는 것이다.

 

고개를 천천히 돌리고 있을 때

돌멩이가 날아들어 유리창이 깨진다. 깨진 틈으로 달빛이 한 움큼 들어와 어둠을 밀어낸다. 그 사이로 주문 같은 웅얼거림이 들려온다.

 

 

 

 



어둠 속에 서 있는 남자. 퀴퀴하고 역겹고 오래된 기억이 치밀어오른다. 몸을 비틀어 침대맡에 숨겨둔 식칼을 꺼낸다. 단단히 쥐고 그를 겨눴다.

꺼져.”

내 목소리는 금간 것처럼 갈라져 있었다. 그는 양손을 천천히 들고 마찬가지로 천천히 뒷걸음질쳤다. 침착한 얼굴이다. 현관에 이르자 주머니에 손을 넣어 지갑을 꺼낸다.

여기. 창문 수리비랑 제 명함을 두고 갈게요. 혹시 궁금하거나 필요한 게 있으면, 연락하세요. 사무실로 찾아와도 괜찮아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도 대답을 기대하진 않았을 터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나갔다. 나는 그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칼을 쥔 채로 조용히 울었다.

 

 

 

 

 

잊었다고 생각했다. 아니 잊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시계를 다시 꺼내보기 전까진.

시계는 멈춰 있었다. 일곱 시 삼십 오 분. 시계를 넣었던 그 시간이었다.

나는 서랍을 뒤져 담뱃갑과 라이터를 꺼냈다. 손이 주체할 수 없이 떨리고 있었다. 라이터를 몇 번이나 떨어트리고 말았다. 불을 붙이자 이내 몸속 깊숙이 아린 연기가 들어왔다. 나는 기침을 시작했다. 그 날 이후로 처음 피는 담배였다.

우리의 시간은 그 날 이후로 죽 얼어붙어 있었던 것이다.

다음 날부터 나는 앓기 시작했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겨울을 기억한다. 유일한 친구에게 버림받은 날이었다. 그 시절 나는 꼽추처럼 고독과 박탈감을 등에 이고 살았다. 부모와 가족이 있는 모든 사람과 마주칠 때마다 질투에 몰래 몸을 떨었고, 그걸 보이지 않으려 고슴도치처럼 움츠렸다. 다가오는 사람에게 가시를 들이밀곤 했던 날들. 그리고 그 날은 그런 나를 유일하게 받아주던 친구가 내게 진저리를 치며 떠난 날이었다.

친구가 떠난 테이블에서 그녀에게 했던 말들을, 식어버린 찻잔을 붙잡고 오랫동안 곱씹었다. 내가 잘못한 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친구에게 그렇게 굴어서는 안 됐다. 하지만 너 마저.

나는 카페에서 나와 유령처럼 도시를 떠돌았다. 골목마다 희끗한 안개가 드리워져 있었고 안개를 들이킬 때마다 나는 흐려져가는 것 같았다. 그렇게 흐려져가다 마침내는 사라져버리길 바라며 헴없이 걸었다. 그러다 그를 발견했다. 낡은 상가의 뒷골목이었다.

그는 주저앉아 울고 있었다. 내 발길을 붙잡은 건 어떤 억울함이었다. 나도 울지 않고 걷고 있는데 나보다는 행복할 저런 사람이 울고 있다니. 저렇게 서럽게. 무슨 용기가 생겼던 건지 나는 그에게 다가가 거칠게 어깨를 흔들었다.

저기요.”

그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나를 깨닫지도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울면 안 되죠. 이런 데서.”

나는 화를 내고 있었다.

여기가 당신 방이에요? 여기 봐요. 지나가는 사람들한테 실례잖아요.”

남자는 말없이 울기만 했다. 가까이서 보니 나보다 훨씬 큰, 멀대같은 남자였다. 나는 갑자기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여기 보라고요. 여기 당신 방 아니라고요! 지나가는 사람한테 폐 끼치고 있는 거 안 보여요?”

나는 남자를 밀쳤다. 그는 어리둥절하게 나자빠졌다.

지금 당장 사과하세요. 지금 당장요. 저한테 사과하라고요. 폐 끼치고 있잖아요.”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횡설수설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르는 새 눈물이 터져 나와 볼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분이 풀리지 않아 씩씩대고 있었다.

남자는 주섬주섬 일어났다. 나는 분에 못 이겨 울기 시작했다. 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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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쓰다가 맒ㅜ

좋아하는 소설인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의 주인공 스밀라가 한국인이라면 어떻게 지낼까, 이런 걸 상상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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