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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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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수 없는 사용자 2016. 5. 6. 23:25

 봄이다.

 봄을 좋아한 적은 없다. 그 대책 없는 화사함과 희망참이 꼭 내 것이 아닌 것 같아서 기분 나빴다. 여기는 내가 있을 계절이 아닌 것 같아. 그런 느낌.

 언젠가 돌아가시기 며칠 전의 할머니를 앞에 두고 봄을 마음껏 싫어한 적이 있었다. 봄은요. 할머니. 꽃이 너무 많이 피어요. 새싹이 너무 많이 올라와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웃어요.

 할머니는 눈을 반쯤 뜨고 먼 곳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뇌졸중인가, 뇌일혈인가. 아무튼 심각해보이는 이름이었고, 할머니는 병명 만큼만 심각하게 죽어가고 있었다. 병실에 들어서면 죽음의 냄새가 어렴풋이 났다. 편안했다. 대학을 자퇴하고 붕 뜬 시절이었다. 알바가 없는 날이면 놀러가 큰삼촌 대신 병실을 지키곤 했다.

 할머니는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했고, 그래서 편하게 얘기할 수 있었다. 앞집 2층에는 중국인처럼 생긴 뚱뚱한 아저씨가 사는데요. 날씨가 좋으면 옥상에서 웃도리를 벗고 뜨개질을 해요. 매일 아침마다 건전지를 사가는 손님이 있는데요. 걸로 뭘 하나 궁금해요. 왜 비싼 건전지를 굳이 편의점에서 살까? 날씨가 좀 풀렸어요. 집 앞에 내논 다라이에 물이 안 얼었더라구요.

 근데 봄이요. 한 번도 좋아해본 적이 없어요. 봄방학도 싫었고 종업식도 싫었어요. 다들 봄을 되게 좋아해요. 따뜻하고, 꽃도 피고, 나들이도 가고, 입학식도 하고, 오티도 하고... 왜들 그렇게 좋아할까?

 갑자기 할머니가 눈을 크게 떴다. 살아오면서 누구에게서도 그렇게 맑은 눈을 본 적은 없었다.

 "여름은, 발견되길 기다릴 뿐이란다."

 투명한 물고기가 가슴을 지나가는 것 같았다. 나는 할 말을 잃었다.

 할머니는 며칠 뒤 죽었다.


 장례식 때도 나는 그 아리송한 말을 마음 속으로 외우고만 있을 뿐이었다. '여름은, 발견되길 기다릴 뿐이란다.' 눈물도 나지 않았다.

 할머니는 그 뒤로 아무 말도 남기지 않았다. 병실 벽을 멀거니 보며 숨만 몰아쉬다 늦은 밤에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나는 그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뇌에 피가 뭉쳐 오늘내일 하는 노인이 그렇게 또렷하게 말을 하리라곤 아무도 생각하지 못할 테니. 나조차 내가 진짜로 들은 게 맞았는지 의심이 가곤 했으니까. 게다가 그 말은 현실의 사람이 했다기엔 너무 영화 대사 같았다.

 하지만 진짜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몇 주 전, 나는 대학을 그만두겠다 선언했다. 예상했던 대로 엄마는 길길이 날뛰었다. 거기 부은 돈이 얼만데, 하는 너무 식상해서 오히려 신선한 대사부터, 걱정과, 비난과, 너 분명히 후회할 거라는 저주 섞인 예언과, 회유. 엄마가 무슨 말을 하든 나는 아랑곳 않았다. 내가 그러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나는 스스로를 잘 아는 편이다. 문제는 아빠였다. 이 사람이 무슨 말을 할지는 당최 모르겠다.

 여보 당신도 뭐라 말 좀 해봐요, 하는 구원요청에도 묵묵히 있던 아빠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내비둬. 정연이도 생각을 하는데. 이제 자기 알아서 하겠지. 그러고선 내게 고개를 돌렸다. 뭐 필요한 거 없냐? 나는 기다리지 않고 대답했다. 육백만 원만 주세요. 독립할려구요. 집도 알아봐놨어요. 엄마는 한숨을 쉬었고, 아빠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가 알아서 하겠지. 사실 제일 듣고싶지 않았던 말이었다.


 그러고서 집을 나왔다. 500에 25짜리 옥탑방을 계약했다. 남은 100만원을 반으로 갈라 살림살이를 장만하고 복비를 계산했고, 남은 반은 생활비로 쟁여뒀다. 미리 봐둔 근처 편의점 알바 면접을 보고, 월요일부터 나오라는 이야길 들었다. 그러고나니 일요일이었다. 아무 할일도 없었다. 기대했던 해방감 보다는, 막막한 슬픔 비슷한 것이 마음에 들어왔다.

 그때가 봄이었다.


 그리고 1년이 지났다.


 나는 여전히 같은 편의점에서 일하고 있다. 까무잡잡한 꼬마 남자애가 아침부터 가게 앞을 기웃거렸다. 유리문 너머로 들여다보다가 눈이 마주치면 딴청을 피웠다. 머리가 곱슬거렸다.


 



-

으아아아아아아 쓰다가 맒...

한주 수고했습니다. 주말 잘들 보내셔요..


"여름은, 발견되길 기다릴 뿐이란다." 라는 말은 제가 쓴 게 아니라 얼마 전에 읽었던 <사는 게 뭐라고>라는 에세이집에 나왔던 대사였어요.


"엄마 남편은 사노 리이치지?"

"아무것도 안 한 지 한참 됐어." 아무것도라는 건 뭘까. 설마 엉큼한 그것일까? 하지만 아무 생각이 없는, 왠지 투명하게 느껴지는 엄마가 그런 소리를 하더라도 엉큼하게 들리지 않는다.

내가 큰 소리로 웃자 엄마도 소리 내어 웃었다.

"엄마, 인기 많았어?"

"그럭저럭." 정말일까?

"나 예뻐?"

"넌 그걸로 충분해요."

또다시 웃음이 터져버렸다.

엄마도 따라 웃었다.

갑자기 엄마가 희미하게 중얼거렸다.

"여름은, 발견되길 기다릴 뿐이란다."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엄마, 나 이제 지쳤어. 엄마도 아흔 해 살면서 지쳤지? 천국에 가고 싶어. 같이 갈까? 어디 있는 걸까, 천국은."

"어머, 의외로 가가운 곳에 있다던데."



여름은 발견되길 기다릴 뿐이라니 무슨 의미일까요?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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